21세기를 바로세울 새로운 인문학적 가치가 경북 안동에서 논의된다.
한국정신문화재단이 개최하는 ‘21세기 인문가치 포럼’이 3일 안동문화예술의 전당 웅부홀에서 열린 개막식을 시작으로 4일간의 일정에 들어갔다.
세계적인 석학과 청중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막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김소영 문화체육비서관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인문학적 가치는 개인의 행복을 이뤄가는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성숙한 발전을 이끄는 기본 토양”이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인문학의 진흥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갈등과 모순을 해소하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품격 있는 선진국으로 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정부는 문화융성의 국정기조 아래 인문정신 진흥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지원을 펼쳐 나갈 것”이라며 “이번 포럼에 참석한 국내외 석학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깊이 성찰해 새로운 정신문화의 비전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개막식 이후 열린 ‘21세기 인문가치와 유교’라는 주제의 첫 번째 기조강연에는 김광억 포럼 공동조직위원장이 ‘21세기 유교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성찰’이라는 내용으로 첫 강연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유교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진다는 적극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받아 왔다”며 “그 까닭은 유교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세속적인 지위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기 위해 유교의 본질을 왜곡했을 뿐 아니라 현실적 맥락에 적실한 설명을 개발하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유학은 이제 경학을 넘어 사회과학적 영역에서 설명력을 갖춰야 할 때”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 사회 영역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것이고, 현대의 실존적 맥락에서 ‘인간 됨(being human)’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인 지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이와 함께 21세기 인문가치 포럼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도 명확히 했다. 그는 “포럼은 문명 간의 대화를 도모하고 비교학적 접근을 통해 유교의 인문가치를 성찰적으로 재조명해 현대의 맥락에서 그 설명력을 모색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것은 유교의 이상향을 찾아나서는 복고적인 몸짓이나 윤리결정론에 의한 도덕재무장운동이 아니다. 유교를 당위성으로서 말하는 경학의 차원을 벗어나서 시대와 장소의 맥락에서 적절성 혹은 적합성으로써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가르침은 성인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 생활에서 타당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중시돼야 한다고 현대적 적합성을 설명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전국인민대표회 부위원장을 지낸 니산(尼山)포럼의 쉬자루 주석은 ‘한중 공동의 운명, 과거의 계승과 발전, 인류에의 공헌’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인문가치포럼의 개최는 한국과 세계가 신인문주의 및 인류 공동의 신 윤리를 세우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진리에 국경은 없다. 퇴계의 학문은 한국에 속해 있지만 세계의 학문이다. 특히 당대의 사람들이 조화, 평화, 안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학자들이 일찍이 퇴계의 학문을 연구하고 평가한 것이다. 퇴계 선생의 발전과 실천 역시 세계인들이 공유하는 정신 자산”이라고 치켜세웠다.
쉬자루 주석은 또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갖가지 현실 모순은 공맹시대, 이정과 주희 및 퇴계 시대와 질적 차이가 없다. 달라진 것은 범위와 정도, 형식 그리고 속도뿐이지만 인류가 처한 고통과 재난은 물질문명의 풍요와 발달로 인해 앞선 선현들의 시대보다 더 심각해졌다”며 “선대부터 쌓아온 유가(儒家)의 지혜가 앞으로 인류에게 필요한 정신적 안식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 내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진 영국학술원의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유교가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유교의 중심은 교육이며, 안동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육자 중 한 명인 퇴계 이황을 낳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황은 오늘날에도 타당성을 지니는 학습 방식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스스로 깨닫기’이다. 이황은 과거 시험을 위해 규격화된 학습 방식을 ‘거짓 배움’이라 일컬으며 경시한 반면 진정한 배움이란 개인의 참여를 수반하고 공부를 개인의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고 설명했다.
또 “이황은 성리학 사상을 기반으로 모든 개인이 독창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펼친 것”이라며 “보다 성취감을 느끼는 개인의 존재와 나아가 보다 계몽된 사회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유교의 교육관과 개인의 자기 발견”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전통사회에서는 사회의 모든 구조가 남성 중심으로 전개됐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분명하게 개선됐다”면서 “이러한 발전을 감안해서 중성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유교적 원리, 즉 정 또는 인정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현대 사회에서 유교실천의 연구방향’이라는 주제의 두 번째 기조강연에서는 중국 인민대 장리원 교수가 ‘유가 윤리와 청렴한 정치(儒家倫理與廉政)’라는 주제로 첫 번째 강연을 진행했고, 이어 대한민국 학술원 김경동 교수와 중국 칭화대 국학연구원의 첸라이(陳來)원장이각각 ‘21세기 세계와 유교의 현대적 의의’와 ‘유가문명의 가치(儒家文明的價値意義)’라는 내용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장리원 교수는 “ ‘염치’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개인과 민중, 사회 및 국가의 필수 덕목이자, 일상생활에서도 사람의 도덕 가치와 덕성, 품격, 가치관념 등을 실현하는 기준인 만큼, 청렴과 염치, 예의 등은 입신, 입국, 입세의 기본”이라고 밝혔다.
김경동 교수는 “현대사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근대화가 초래한 변화의 결과로 외로운 인간의 군상, 개인주의의 창궐 및 가족과 이웃, 지역사회의 공동체 관계 붕괴와 같은 공동체 쇠락, 상실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나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강조로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를 경험한 서방세계에서 유교적 공동체주의(Confucian communitarianism)가 대안적 이념이 될 수 있으며, 공동체 복원 운동의 지침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첸라이(陳來)원장은 “유가문화는 근대와 현대의 발전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왔으며, 현대화의 사회전환과 세계적인 변화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아시아적 가치의 연원은 동아시아 유교문화에 있으며 이런 아시아적 가치는 동아시아의 문화와 종교 및 정신적 전통에 기원한 역사 발전인 동시에 아시아가 현대화 과정에서 세계에 대응해야 할 도전”이라고 말했다.
이날 개막식에 앞서 오전 10시부터 안동향교에서는 300여명의 유림과 국내외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포럼 고유제를 겸한 문묘제례가 올려졌다. 제례 초헌관은 이용태 한국정신문화재단 이사장이 맡았고, 쉬자루 중국 니산포럼 주석과 도널드 베이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교수가 각각 아헌관과 종헌관으로 참여했다.
‘현대 세계속의 유교적 가치’라는 대주제로 열리는 이번 포럼은 6개의 개막식 기조강연과 4개의 특별강연, 3개의 플레너리 세션 및 2개의 라운드 테이블, 6개의 특별세션으로 구성되며, 각 세션은 3일과 4일, 5일, 총 3일간 경북 안동 문화예술의 전당과 안동대 국제교류관, 유교랜드, 안동시민회관 등에서 진행된다.
3일 간의 기획세션과 특별세션 일정이 마무리되면, 낙동강 둔치에서 열리는 부용지애 공연 무대에서 ‘21세기 인문가치 포럼’의 결과를 종합한 ‘안동선언문’이 채택된다. 이 선언문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도널드 베이커 교수가 낭독한다.
포럼 마지막 날인 6일에는 포럼에 참가한 국내외 학자들이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등을 돌아보는 문화탐방행사도 마련된다.
한편, 한국정신문화재단은 유학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가치가 세계문명사에 미치는 영향을 재조명하는 이 포럼을 해 마다 열어 ‘인문판 다보스포럼’으로 발전시켜나갈 계획이다. (경북=김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