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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523호 ‘여수 석보’ 내년 3월까지 발굴조사

이달 중순까지 문화재청에 발굴조사 허가신청 마치고 20일경 사업 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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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영만기자 |  2014.06.10 16:50:20

▲상공에서 내려다 본 여수석보 유적지 일대 전경

국가 사적 제523호로 지정된 여수석보(麗水 石堡)에 대한 발굴조사가 내년 3월 완료될 전망이다.

여수시는 여천동 868번지 일원 2만1740㎡ 여수석보 유적지에 대해 10억 원을 들여 3차 발굴조사를 이달부터 추진한다.

앞서 시는 지난 2001년과 2002년 명지대와 전남대, 순천대와 공동으로 여수석보 1차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성벽과 문지 2개소, 건물지 3동, 해자 등을 확인하고, 청자·백자·분청사기 등 유물 590점을 발굴했다.

지난 2007년 2차 발굴조사에서는 서벽과 서문지, 수구, 배수로, 해자, 건물지 등 8동을 발굴하고 우물 1곳과 연못지 1곳 등을 확인했다. 또한 수키와·암키와, 엽전, 잔, 병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시는 마지막 발굴조사 추진을 위해 이달 중순까지 문화재청에 발굴조사 허가신청을 마치고 20일경 사업에 착수할 방침이다.

최종 발굴조사가 끝나는 내년 3월 이후부터는 이를 바탕으로 여수석보 종합복원관리계획을 수립해 2016년 7월부터 2021년 6월까지 여수석보 복원과 주변정비 등을 추진한다는 복안을 마련하고 있다.

여수석보는?

‘여수석보’는 지난 1987년 1월 ‘석창성(石倉城)’이라는 명칭으로 전남도 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됐다.

높은 문화재적 가치에도 조명을 받지 못하다 지난 2012년 6월에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523호로 승격된 바 있다.

여수석보는 통일신라 혹은 그 이전에 계획된 도시로서 장방형 네모꼴 평지성의 형태를 이루며 고려시기 가장 번창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초기에 이르러 국토방어와 도시계획 개념이 변화함에 따라 도시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도 교통요지로써 조운창(漕運倉) 또는 장시 등이 번성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특히 평지성과 해자가 잘 보존된 국내 유일의 유적지로 통일신라 시기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실제 성 주변에서 발견된 여러 점의 고대 토기 및 자기 등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증명하고 있다.

멀리는 삼국시대 적갈색·청회색 토기 조각과 13~14세기 경 무문청자 및 상감청자, 15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사기, 16세기 인화문 분청사기 등이 출토됐다.

현재 동·서·남 3개 성문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고, 체성부(體城部·성벽의 몸체 부분)와 해자(垓子·성 주위에 둘러 판 연못)의 잔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파악돼 발굴사업은 앞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여수시 관계자는 “여수석보의 역사성을 정립하고 관광자원화 함으로써 지역사의 한 획을 긋는 성과를 내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여수석보는 둘레 703m, 높이 3~4m의 네모꼴 성벽으로 7만7393㎡의 문화재 보호구역내에 위치하고 있다. 시는 전체 부지면적 가운데 100필지 7만1710㎡의 매입을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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