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여성인물과 관련된 기록이 풍부한 편이다. 타 지역과 차별화되는 여왕, 여신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반가 여성,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 여성들의 삶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경북의 여성인물들은 여성에게 녹록치 않았던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며 당당히 제 몫을 다해왔다.
당시 여성리더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경북의 여성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선택하고 일구어 나갔는지를 되새겨보면서 현재에 적용할 수 있다.
경북도와 경북여성정책개발원에서 발간한 ‘여행(女行)을 여행(旅行)하다’를 통해 경북 여성인물의 발자취와 흔적을 따라가며 역사 속의 그들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지혜로움이 남달랐던 덕만
선덕여왕은(善德女王, 재위 632~647)은 신라 27대 왕이다. 어릴 때 이름은 덕만이다. 신라 26대 진평왕과 왕비 마야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 중 맏딸이다. 둘째 천명은 훗날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를 낳았으며, 셋째 선화는 백제 무왕과 결혼했다.
아버지 진평왕이 죽고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는 632년이며 이때 선덕여왕은 50세가 훨씬 넘은 나이였다고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나라 안에서는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쳤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어려운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 나섰다.
각도에 사신을 보내어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힘든 백성들을 구제를 위해 1년간 세금을 면제 해주었다. 이로 인해 여왕 즉위로 인해 우려했던 민심들은 안정을 찾았다.
전쟁이 빈번한 시기, 스스로 전선을 누빌 수 없는 여성임은 선덕여왕에게는 핸디캡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왕은 탁월한 용병술, 용인술로 이를 극복했다.
선덕여왕에게 뽑힌 최고의 인재는 희대의 명장인 김유신과 외교술의 천재인 김춘추였다. 진골이기는 하나 가야의 후손이라는 치명적 약점으로 당시 신라 귀족으로부터 소외감을 느꼈을 김유신과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신분적 약점을 지닌 김춘추를 과감히 등용했다.
만만치 않았을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행한 이런 신진인사 등용책은 불안했던 왕권을 안정시키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선덕여왕과 왕위를 두고 경쟁했던 김용춘의 아들이었던 김춘추는 선덕여왕에게 가장 큰 정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지 않고 그를 최고의 정치 파트너로 인정했다.
또 신라의 순수 귀족이 아닌 김유신에게 군사권 전체를 맡기면서 멸망시킨 왕국의 왕족을 가장 충직한 신하로 삼을 수 있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신라통일의 주역이라면 그들을 등용한 선덕여왕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운 셈이다.
선덕여왕이 나라를 다스릴 무렵 신라는 국가적인 위기에 몰렸었는데 백제의 의자왕이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성 40여개를 빼앗고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대야성을 함락했다. 여기에 고구려까지 가세해 백제와 함께 당항성을 함락했다. 당항성은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길목이었기에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던 것이다.
이때 선덕여왕은 과감하게 견제와 긴장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외교술을 펼쳤다. 김춘추를 일본과 당나라로 파견해 고구려와 백제 배후에 동맹관계를 결성해 쉽사리 신라를 침범할 수 없는 외교적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러한 적절한 외교를 통해 국외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은 신라는 부지런히 국력을 키워 마침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은 다양한 문화적 업적을 이뤄낸 왕이기도 했다. 즉위 3년에 서라벌 북천 남쪽에 절을 세우고 분황사(芬皇寺)라 이름 지었다. 향기로운 황제의 정. 바로 선덕여왕의 음덕이 온 나라에 꽃향기 같이 흩날리기를 바라는 뜻으로 지은 절이다.
또 같은 해에 영묘사(靈廟寺)도 낙성했다. 혼령을 모신 절이다. 여왕 재위 중 단 한 해도 전쟁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이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영령들을 위해 지은 절이다.
여왕은 그가 지은 수많은 절중에서도 이 영묘사에 가장 자주 들렀다. 남성이었다면 능히 전장에 직접 뛰어 진두지휘할 여장부였지만 여성인지라, 또 늙은 몸으로 전장에 나가지 못하는 아픔과 슬픔을 영묘사에서 탑돌이를 하면서 달랬다.
황룡사(黃龍寺)는 신라 당대 최고의 절이었다. 여왕 즉위 5년(636년) 3월 여왕이 병이 들자 이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여는 등 불법의 힘에 크게 의지했다. 불력에의 의지는 개인적인 취향만이 아니었다. 여왕에게 부처의 힘은 곧 국가를 지키고자 함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신라 최대의 절 황룡사에서 동양 최대의 탑을 세운 것도 선덕여왕의 호국의지의 발로였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의 제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이기도 했다.
선덕여왕은 자장법사의 전언을 듣고 신중한 상의를 거친 후 탑을 축조한다. 당시의 탑은 부처님을 모시는 불교적 조형물일 뿐만 아니라 국가를 외침이나 위기로부터 보호하고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는 염원을 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선덕여왕 유적 및 탐방지
천년고도 경주에 선덕여왕과 관련한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선덕여왕릉(보문동 산79-2)은 사천왕사 위 낭산의 남쪽 정상에 있다. 사천왕사 터를 가로지는 철길을 건너 나지막한 낭산을 800m 정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밑 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2, 3단의 둘레돌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도리천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 꼭대기, 곧 사천왕 위에 있는 부처의 나라인데 어떻게 그곳에 무덤을 만들 수 있을지 신하들이 어리둥절해하자 여왕이 직접 낭산 남쪽이라 알려주었고 그 말을 따라 여왕의 능을 만들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 후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자, 비로소 낭산의 남쪽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됐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재위 중에 만든 국보 31호 첨성대(인왕동 839-1)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대릉원과 반월성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네모난 기단 위에 화강석을 가공해 술병모양의 원통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 올렸고,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 놓았다.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고 있다.
첨성대의 역할과 소용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천문관측용이거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등 분분하다. 하늘의 천문을 관측하든, 하늘에 제사를 지내든 간에 선덕여왕은 하늘의 힘을 빌어 국가의 융성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아름다운 축조물, 첨성대를 지었다.
경주 톨게이트에서 시내 방향으로 들어오다 보면 오릉이 있으며 오릉교를 지나 100m 정도가면 흥륜사(사정동 281-1)가 있다.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면서 선덕여왕 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묘사의 유래에 대해서는 전쟁터에서 숨진 신라 청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도깨비들이 하룻밤 연못을 메워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선덕여왕이 백제 군사500여명이 여근곡(건천읍 신평2리 상원신 마을 뒤편)에 매복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 영묘사의 못인 옥문지(玉門池)에서 울고 있던 개구리 덕분이었으니 여러모로 국가의 운명과 연관된 절이었다. (경북=김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