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 세종대왕은 평생공부를 통해 정치 국방 교육 과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워낙 잘 알려진 군주이기에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세종에 대해서는 지레짐작하는 부문도 있다. 대부분을 검증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긴 탓이다.
최근 출간된 ‘세종의 공부’에서는 기존의 시각과 다른 점들이 눈에 띈다.
저자는 역사 작가 이상주 씨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이기도 한 저자는 ‘조선명문가 독서교육법’,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등의 수준 높으면서도 쉬운 내용의 책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세종의 공부’는 세종에 대해 궁금했을 만한 내용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상주 작가로부터 세종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본다.
-세종의 뜻은 무엇인가.
■세종은 묘호다. 3년 상을 치른 뒤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올리는 호칭이다. 세종(世宗)은 나라를 세우거나 문화 경제적인 면에서 나라를 크게 중흥시킨 경우에 받는다. 임금이 승하하자 신하들은 문종(文宗)도 묘호로 건의했다. 문종은 문장이나 문학에 뛰어난 임금이다. 그러나 ‘세종이 더 적합하다’는 세자(훗날 문종)의 주장에 따라 세종으로 확정됐다.
-세종은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
■틈새 시간을 이용했다. 조선의 임금은 여가시간이 거의 없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빼곡한 일정이다. 세종에게도 모든 임금과 마찬가지로 24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바쁜 정사에서도 하루에 꼬박 5시간 이상의 독한 공부를 했다. 이는 틈새시간 이용으로 가능했다. 수라를 들면서도, 밤에도, 왕비의 거처인 내전에서도, 환후 중에도 틈만 나면 책을 보았다.
-세종의 공부는 백독백습으로 알려져 있는데.
■백독백습은 일백 번 읽고 일백 번 베낀다는 뜻이다. 공부에 대한 열의를 극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책의 간행을 독려하고, 수많은 학자에게 공부할 여건을 제공했다. 그러나 임금은 글쓰기에는 손을 내저었다. 시를 짓거나 문장을 쓰는 일을 여유로운 취미생활로 여겼다. 책을 읽어 좋은 생각을 얻었으면 실천하기에 바빴다. 글을 쓸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세종이 대신들에게 역사교육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 세종은 대신들에게 역사학 서적을 읽게 했다. 이는 신하들이 철학적인 면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실용학 보다는 인문학에 깊이 빠졌다. 그들은 책을 통해 삶의 자세를 궁극적으로 탐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계기로 삼았다. 세종은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실용학과 인문학이 융합되어야 함을 생각했다. 그래서 신료들에게 실용학인 역사학 공부를 권유했다. 세종이 말한 역사학은 역사철학이 아니라 역사의 흥망성쇠 등을 통해 다스림의 인간관계를 터득하는 길이었다. 임금의 독서에 대한 시각은 실용적이었고, 자주적이었다.
-임금의 독서를 소헌왕후가 어떻게 내조했는가.
■임금은 책을 볼 때 옻나무의 기름을 사용했다. 이 기름불은 밝은 데다 연기가 나지 않는다. 소헌왕후는 책읽기에 몰두한 임금을 위해 각 도 수령에게 옻나무 열매를 채집을 지시했다. 옻나무의 열매를 통째로 따서 서울로 올려 보내도록 명령한 것이다. 품질이 좋은 기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세종의 시험문제 출제에 대한 시각은 어땠는가.
■세종은 시험문제는 쉬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과거시험을 쉽게 그리고 현실과 연관돼 내라고 지시했다. 또 임금이 최종시험인 전시에서는 직접 문제를 출제했다. 과제는 나라의 현안에 대한 대책을 묻는 것이었다. 세금문제, 군사문제, 농사문제 등 다양했다. 요즘의 대학 논술문제가 비슷했다. 세종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꼭 참고하고 싶은 내용을 고민했다'고 출제 배경을 설명한 적이 있다.
-세종이 군사훈련을 혹독하게 시켰다는데.
■세종은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대왕이다. 세종에 대한 이미지는 공부에만 몰두한 것으로 오해될 수가 있다. 운동을 하지 않아 비만하고 각종 질병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은 조선의 군주 중 가장 스포츠를 중시하고, 군사훈련을 가장 강하게 시켰다.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인 강무를 조선의 임금 중에서 최다인 27회를 실시했다. 강무는 보통 수천에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열흘에서 보름동안 야외에서 생활을 하는 실전훈련이다. 수십 명이 죽기도 한 강한 훈련이었다. 또 매 사냥과 격구에도 무척 관심을 기울였다. 군사 훈련차원에서 전국에 격구 전용구장을 30개나 건립했다.
-이토록 강한 훈련을 한 이유는.
■힘이 있어야 나라가 유지됨을 생각한 것이다. 임금은 세자를 18세 때부터 강무에 참여시켰다. 또 수양대군은 13세 때 처음 군사훈련에 동행했다. 세종은 왕실부터 강한 상무정신을 심었다. 임금은 곧잘 왕족을 대동하고 군사들과 전투체력 행사를 실시했다. 왕과 왕세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양, 안평, 임영대군에게 말을 달리며 활을 쏘게 했다. 종친들에도 같은 주문을 했다. 또 군사들과 시위무사들에게도 목검술을 시범 보이게 하고 달리기 경쟁을 하게 했다.
-공부방에서는 임금과 신하 중 누가 높았나.
■임금의 공부는 경연이다. 경연은 신하에 의한 임금의 통제 수단이기도 했다. 세종은 학생으로서 배움에 충실하되 왕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았다. 공부방에서도 임금이 스승보다 높은 존재였다. 경연관들이 꿇어 엎드려서 강의를 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공부방에서는 스승이 더 높은 상징성이 있었다.
-임금의 특별경호 부대 가능성도 설명돼 있는데.
■경기도 남양주의 묘적사에 왕실의 군사훈련에 대한 구전이 내려온다. 김수온이 쓴 묘적사 중창기를 통해 이곳이 세종과 후궁인 신빈김씨, 그리고 아들인 밀성군과 세조가 관여된 왕실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 군사훈련이 이곳에서 실시됐음도 알 수 있다.
-세종의 공부를 정리한다면.
■세종에게 관심은 실용이었다. 백성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 효와 상식이 통하는 예의국가를 꿈꿨다. 세종의 평생공부는 세 가지를 이루려는 기나긴 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