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의 식민지배 등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아 논란이 일고 있다.
반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날 패전일을 맞아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료를 봉납하고, 현직 일본 방위상은 3년 만에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참배했다. 한국이 일본과 관계 개선에만 몰두해 역사 문제를 외면하는 동안, 일본은 왜곡된 역사 인식을 더 공고히 하고 있는 것.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는 ‘자유’라는 단어가 총 50회, 이어 통일(36회), 북한(32회), 국민(25회) 등의 단어가 주로 나온 데 반해 ‘일본’이라는 단어는 “작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처음으로 일본을 넘어섰고”, “올해 상반기 한국과 일본의 수출 격차는 역대 최저인 35억달러를 기록했다”는 단 두마디만 등장했다.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에 따른 우리 민족의 고난과 일본을 향한 비판 및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요구 등은 이번 광복절 기념사에 한 줄도 담기지 않았으며, 특히 우리 정부가 최근 일본이 사도광산 전시물에 조선인 ‘강제노역’을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동의해 준 문제도 담겨 있지 않아 내용만으로는 광복절 경축사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에 일본 언론들은 이 같은 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과 관련한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은 데 주목하고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이날 ‘한국 대통령 연설에 일본 비판 없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에서는 역사 문제 등을 둘러싼 대일 비판을 담는 사례가 많았으나 대일 관계를 중시하는 윤 대통령의 연설에서는 작년에 이어 일본 비판이 전무했다‘면서 ”광복절 연설에서 일본과 관련한 생각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니혼게이자이신문도 ’한국 대통령 광복절 연설에서 대일 관계 언급 없어‘라는 기사에서 윤 대통령이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 행사 연설에서 대일 관계나 역사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고 소개했으며, 산케이신문도 ”연설의 대부분을 통일 문제에 할애, 대일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대통령실 한 고위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오늘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대한민국이 그동안 자유 가치를 기반으로 꾸준히 경제 성장을 해오며 일본과 대등하게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는 함의가 있다”며 “한일관계를 지적하지 않았지만, 한일관계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어 이 고위관계자는 “우리 청년과 미래세대는 일본 여행을 하고 일본 청년과 교류와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며 “과거사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지적하고 개선해 나가야 하지만, 우리가 더 크게 되고, 더 큰 미래를 바라보며 국제사회 환영을 받으며 일본 협력을 견인해 나갈 때 그것이 진정한 극일”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은 2022년 취임 첫해 거행된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과거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지키기 위해서 정치적 지배로 부터 벗어나야 하는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이라며 일본과의 관계 회복 의지만 내비쳤으며, 지난해에는 일본을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 “안보와 경제의 협력 파트너”로 규정하면서 한·미·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윤 대통령은 앞서 취임 이후 거행된 두 차례 경축사에서도 과거사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아 역사 문제를 한·일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여기고 회피하려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윤 대통령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은 일본의 태도다. 기시다 총리는 도쿄 일본무도관에서 개최한 ‘전국전몰자 추도식’에서 전쟁 당시 가해 사실이나 반성을 언급하지 않은 대신 고위급 인사들과 함께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료를 봉납하거나 참배했다. 또, 현직 각료들은 지난 2020년 이후 5년 연속으로 일본 패전일에 신사를 참배하는 등 과거 전쟁의 책임을 부정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특히 한국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기하라 미노루 일본 방위상도 2021년 8월 이후 3년 만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 의미가 남다르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에 한국 외교부와 국방부는 별도의 입장문을 통해 “시대착오적인 행위에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와 방위주재관을 각각 초치해 항의했으나 윤 대통령이 일본의 퇴행에 대해 침묵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정부 이 같은 대응에 얼마나 무게를 둘지는 의문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노종면 원내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이 내놓은 광복절 경축사는 모두에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술했지만, 틀에 박힌 문장에서 진심이라고는 단 한줄도 읽어낼 수 없었으며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일제’ 또는 ‘일본’이라는 표현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라며 “최악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확인한 윤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은 목불인견(目不忍見·눈앞에 벌어진 상황 따위를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음)”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도 “우리 국민의 민생에는 거부권을 남발하면서 일본의 역사 세탁에는 앞장서 ‘퍼주기’만 하는 이 정권의 몰역사적 굴종 외교와 친일 행보를 멈춰 세우는 데 온 힘을 다 쏟겠다”고 밝혔으며,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도 “경축사에 일본 제국주의 침탈과 위안부·강제징용·독립투사들에 대한 위로, 일본에 대한 사과 요구는 단 한 줄도 없다”고 반발했다.
또한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은 “광복절은 일본의 반성을 촉구해야만 하는 날로서 통일을 말하기 전에 35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 시절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난의 역사를 말하고 일본의 죄를 말해야만 한다”며 “이러다 독도까지 잘못되는 거 아닌지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CNB뉴스=심원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