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상 파트 노동자들은 민원을 피하기 위해서 일단 죄송하다는 게 베이스로 깔려진 상태에서 고객들을 접할 수밖에 없어서 감정노동의 수준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혹시나 나의 감정이 다른 고객에게 전해져 그것이 또 민원을 유발할까 봐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자 애쓰는 것이 보상직원들의 일상이다.
#. 지점 업무직 노동자들이 귀책 사유가 없음에도 고객에게 사과해야 했던 이유는 고객의 민원이 지점장으로부터 받는 성과평가와 연동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업무직 노동자들은 시끄러운 일이 자주 발생하면 지점장에게 내 능력치가 떨어져 보일까 봐 불합리한 사과, 성희롱 등 업무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당한 일이 있어도 자기 감정표현도 못 하고 부당함을 계속 참아야 했다.
#. 항상 상냥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고 손님이 험한 말 해도 일단 듣고 있어야 하는 감정노동이란 익숙해졌다기보다는 이골이 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감정노동을 심하게 하고 있구나, 그렇게 인식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니고 이게 내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자신의 일이 가지는 특성 중 하나로 여기며 감내하고 있었다.
#. 이제 반말에는 내성이 생겨서 아무렇지 않고 욕설도 이골이 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욕설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사무금융 노동자 업무상 정신질환 실태 및 대응 연구’ 중 감정노동 관련 개별 인터뷰에서 발췌. 2021년 3월)
‘감정노동’은 고객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혹은 기업에서 요구하는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고무시키거나 억제함으로써 공적으로 드러나는 표정이나 몸짓을 관리하는 과정을 뜻한다.
은행원·승무원·전화상담원과 같이 직접 고객을 응대하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 종사자들이 주로 해당된다. 문제는 감정노동자들이 인권 침해 및 정신적 스트레스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는 것.
실제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사무금융 종사자 1181명을 대상으로 정신질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직무스트레스 고위험군(상위 25%)에 해당됐고, 감정노동에서 조직의 보호 체계를 통해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90% 이상이었다. 감정 부조화를 겪는 비율 또한 약 80%로 나타났다.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과도하고 지속적으로 발생할 경우, 우울증·공황장애 등 정신적인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감정노동자의 규모는 약 8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고객이라는 ‘갑’의 위치를 빙자해 이들에게 함부로 대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우리의 부모, 자녀, 가족들이다. ‘갑’과 ‘을’의 위치는 고정적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따라 뒤바뀌어 움직인다는 점도 직시해야 한다.
사회적 인식 개선에만 매달려서는 해결이 안 된다. 강력한 보호 및 대응장치가 요구된다.
일단 2016년부터 금융 관련법 개정에 따라 금융기관은 노동자 요청 시 고객으로부터 분리 및 담당자 교체, 감정노동에 대해 치료·상담지원, 상시 고충처리 기구 마련, 피해를 입은 직원이 요청하는 경우 수사기관에 고발토록 했다.
또한, 2018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에 따라 산업근로자 전체를 대상으로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조치’가 사업주의 의무로 명시됐다.
그러나 함정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 앞서 언급한 인터뷰 사례처럼 보호 체계는 사문화됐고 미작동 상태다.
일손이 부족하고 업무가 바쁘다는 명목하에 고객으로부터의 분리나 담당자 교체 등과 같은 현장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소비자와의 갈등을 줄여야 하고 평판을 신경 써야 하는 회사 차원에서는 친절을 강조하다 보니 감정노동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더 이상 희생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에 금융노동자들의 경우 국회에 최근 제출된 ‘감정노동 보호 7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개정안에는 특히 대면에 의한 방식으로 고객을 응대하는 경우 해당 장소에 직원 보호에 대한 안내문 혹은 경고문구 부착해야 하고, 전화로 고객을 응대하는 경우 고객에게 직원 보호에 관한 내용을 사전 고지하도록 했다.
단지 이 조항 하나만으로도 금융권 종사자들은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창구 앞에 고객응대직원에 대한 보호 관련 유의사항과 처벌조항을 적은 안내판이 세워지면, 악성 민원인이 막말을 함부로 퍼붓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금융권뿐만 아니라 모든 고객응대근로자들은 마땅히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직원이 행복해야 회사 그리고 고객도 행복하다. 사측도 감정노동과 고객 폭력 등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인 보호조치를 취하고 선제적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밝은 미소와 목소리 속 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축적돼 잡아먹히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