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새 국회는 정쟁으로 얼룩진 지난 국회를 반면교사로 삼아 민생입법 완수를 지상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특히 재벌개혁을 공약으로 내건 더불어민주당이 176석의 거대여당으로 출범한 만큼, 잠자고 있던 대기업 규제 법안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CNB는 주요 기업정책을 분야별, 이슈별로 나눠 연재하고 있다. 이번 주제는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오랫동안 제안해온 일명 ‘기업살인법’ 이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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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고 노회찬 의원이 발의
20대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
정의당이 다시 수면 위로 올려
산재책임 방대해 과잉입법 논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참여하고 있는 ‘산재사망대책마련 공동 캠페인단’은 2019년 고용노동부 중대재해 조치현황을 토대로 최근 ‘2020 최악의 살인기업’을 선정했다.
이에 따르면 작년 기준 1위는 7명의 하청노동자가 사망한 대우건설이었고, 2위 현대건설(6명), 3위 GS건설(5명)로 나타났다. 공동 4위(4명)는 롯데건설·한신공영·수성수산, 공동 7위(3명)는 LG화학·은성산업·서희건설·유원조경개발·중흥토건·포스코건설·한화 대전사업장이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9년 산업재해 재해자 수는 10만9242명,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2020명이다.
이 중 노동계가 문제로 삼는 건 ‘중대재해’다. 산업안전보건법에서는 ‘중대재해’를 산업재해 중 사망 등 재해 정도가 심하거나 다수의 재해자가 발생한 경우로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재해 ▲3개월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부상자가 동시에 2명 이상 발생한 재해 ▲부상자 또는 직업성 질병자가 동시에 10명 이상 발생한 재해로 규정하고 있다.
노동계에서는 중대재해가 단순히 개인의 실수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위험을 제대로 예방하고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기업범죄’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중대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재해사건은 일선 현장노동자 또는 중간관리자에게 책임을 묻고 가벼운 형사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미봉돼 버린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2013년~2017년까지 5년간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한 법인에 선고된 평균 벌금액은 약 448만원 수준이다. 이에 노동계 및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인명사고에 대해 경영책임자와 기업의 형사책임을 묻는 ‘기업살인법’을 도입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331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연합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는 지난 12일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산재사망·재난참사 피해자가 재해로 인한 트라우마는 물론 처벌되지 않는 책임자와 개선되지 않는 현장을 지켜보는 고통 속에 삶을 지속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심지어 재해의 진상을 규명하는 몫도 피해자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며 기업처벌법 도입을 강하게 촉구했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의역 스크린도어·석탄화력발전소 사망사고, 이천 물류센터 화재참사 등 기업의 책임유무가 거론되는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필요성에 힘을 더하고 있다.
징벌적 손배 도입
이 같은 움직임 속에 국회에는 이미 관련법이 제출돼 있다.
강은미 의원(정의당)이 지난 6월 대표발의한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책임자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은 사업주 및 법인의 경영책임자 등에게 종사자·이용자 등의 생명 및 신체를 보호할 유해·위험 방지 의무 등을 부과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사업주 및 법인의 경영책임자 등을 처벌함과 동시에 법인을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정의당이 나선 것은 2017년 4월 고 노회찬 의원(당시 정의당 소속)이 같은 취지의 법안을 최초발의 한데서 유래한다. 그 이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사망사고 등이 발생했지만 해당 법안은 20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이번에 강 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이 유해·위험방지의무를 위반해 사람이 사망하는 결과가 발생한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000만원 이상 10억원 이하의 벌금’, 상해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특히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손해액의 3배 이상 10배 이하의 범위에서 배상할 책임을 지도록 했다.
즉, 사망에 이르는 대부분의 중대재해는 일하는 개인의 위법행위나 과실이 원인이 아니라 안전을 위협하는 작업환경, 기업 내 위험관리시스템의 부재, 안전을 비용으로 취급하는 이윤 중심의 기업문화, 재해를 실수로 간주하는 잘못된 인식이 빚어낸 결과라는 게 이 제정안의 탄생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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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우려의 시각도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의하면 형사처벌의 전제가 되는 위험 등 방지의무를 부담하는 ‘경영책임자 등’의 범위에 ‘법인의 대표이사 및 이사’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법인의 모든 이사를 경영책임자에 포함시키는 것은 과잉입법이라는 의견이 있다.
또한 유해·위험방지의무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사업장 등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의 형사책임으로 이어져 사실상 결과책임이 인정될 수 있어, 책임주의원칙에 위반되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된다.
손해배상과 관련해서는 다른 법률에서 정한 손해액 상한보다 높고, 입증책임을 사업주·법인 또는 기관에게 일률적으로 부담토록 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도 살펴봐야 할 항목으로 제시됐다.
이밖에도 유사한 유형의 과실범 내지 안전의무 위반범에 비해 법정형이 높고,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처벌되지 않던 자를 특별법을 만들어 처벌범위 내에 포함시키면서 기존 일반법의 처벌 대상자보다 더 과중한 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타당한지도 따져봐야 한다는 것.
아울러 형사처벌에 더해 영업 허가 취소·정지 등의 제재를 가하도록 했는데 이를 행정기관이 아닌 법원에서 직접 판단해 부과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처벌사실 등의 공표 역시 과잉금지원칙과 관련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찬·반이 엇갈리는 가운데 향후 국회에서의 법안 논의과정에 촉각이 곤두서고 있다.
앞서 지난 20대 국회에서 고 노회찬 의원이 제출한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안’이 다뤄지지 못하고 유야무야 묻힌 바, 이번 21대 국회에서 노동계의 숙원이 이뤄질지 추이가 예의주시 되고 있다.
강은미 의원실 관계자는 CNB에 “하청 등 위험의 외주화, 산재도 외주화다보니 책임소재가 분명치 않고 위험방지의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비용으로만 계산되는 불행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법사위에 상정됐지만 아직 논의가 이뤄지진 않은 상태”라며 “현장의 목소리는 높은데 (국회에서) 반영이 안 되고 있지만 제정안 통과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거대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 법안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보다는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거나 법원에서 양형기준을 높이는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국회에서 제정안이 탄력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CNB=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