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은 ‘거대한 환상(Great Illusion)’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늘날의 국가들은 재정적,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상호 의존하고 있어서 승자도 패자와 똑같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전쟁은 이미 채산성을 잃었으며, 어떤 국가도 어리석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국가간에 맺어진 긴밀한 경제 연결성이 미래의 세계대전을 막아줄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대를 담은 이론이었다.
에인절은 당시 강대국들 사이에서 팽배했던 ‘군사적 정복이 이익이 된다는 믿음’이 ‘거대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봤지만, 반대로 ‘이익이 없으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 역시 거대한 환상인 건 매한가지였다.
불과 4년 후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전 유럽이 미증유의 전화에 휘말리게 됐기 때문이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약 40년간 이어진 유럽의 평화와 수많은 낙관론자들의 기대는 거대한 전쟁기계의 가동으로 대체됐고, 이후 약 4년간 약 1000만명의 전사자를 낳았다.
에인절의 ‘환상’은 오늘날까지 남아 수많은 이들에게 근거없는 기대감을 선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해 11월 중국 사회과학원 국제전략연구원 소속 수석연구원 푸잉(傅瑩)은 “미국과 중국 경제는 너무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떼어놓을 수 없다”며 “양국 경제가 밀접하게 얽혀있어서 미‧중 무역전쟁이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푸잉의 예상과 달리 이후 미국과 중국은 전면적인 무역전쟁 단계에 돌입했다. 두 강대국의 다툼이 어느 단계까지 이어질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경제논리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을 촉구하는 사람은 많았다.
지난 4월 다카스기 노부야 전 한국후지제록스 회장은 일본의 시사월간지 ‘문예춘추’ 4월호 대담기사에서 당시 아베 신조 총리를 위시한 강경파들이 주장하던 한국 제재 주장에 대해 “양국 경제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그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면 피해액이 셀 수 없을만큼 막대하다”며 “일본 역시 큰 영향을 받게 된다”고 반대했다.
그 당시는 이미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 등이 “관세,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 등 여러 보복 조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언급한 시기였다. 불화수소 등 반도체 재료소재의 수출 제한도 이 당시 논의된 일본의 제재카드 중 하나였다.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무시하고 일본은 지난 7월 한국을 향해 제재의 칼을 들이댔다. 이후 한달 넘게 양국은 경제전쟁 국면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적 긴밀성은 대립하는 두 나라의 갈등을 봉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민주평화론’ 작동하기 어려운 유사민주주의
그렇다면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이론에 기대보는 건 어떨까? 과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주창했던 ‘영구평화론’에 근거한 ‘민주평화론’이다.
한국도 일본도 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양국의 대의정치구조와 시민사회가 제어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다. 하지만 이 역시 기대난망이다.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요건으로 꼽히는 ‘선거를 통한 주기적 정권교체’가 적어도 일본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일단 국민의 정치참여도가 높지 않고, 시민사회의 역량도 더없이 미약하다. 언론자유도 역시 2019년 67위로 한국(41위, 아시아 1위)에 비해 크게 낮다. 정부 정책에 대한 반론 보도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정부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는 매체가 많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당분간 양국이 대립국면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 최근 한국과 일본, 미국 정가에서 끊임없이 ‘창조적 해결책’이 거론되는 건 그만큼 그런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단계적으로 서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며 멀어지는 ‘결별’의 과정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단교’까지 이를 수 있고, 더 갈등이 깊어지면 소규모 무력분쟁도 일어날 수 있는 미래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양국 모두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이 개입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대립 구도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건 아니다. 양국 국민이 가진 상대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본질적 대립 구조는 계속 이어진다.
이쯤되면 또다른 ‘전쟁하지 않는 이론’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현재까지 알려진 건 두 가지다.
“핵을 가진 나라끼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맥도날드가 진출한 나라끼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