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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년-겨레와 함께한 기업②] 유일한 박사 독립정신 잇는 유한양행·유한킴벌리

민족과 함께한 90년史…‘나눔·평화’로 거듭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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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19.04.05 12:43:40

유일한 박사의 생전 모습. (유한양행 제공)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현실에도 아랑곳 않고 ‘해방의 마중물’이 된 기업인들이 있다. 소화제를 팔아 독립군 자금을 댄 동화약품 민강 사장, 일제 지명수배를 받던 독립운동가를 도와준 구인회 LG 창업주, 독립군 자금줄이 된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한 허만정 GS그룹 창업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박승직 두산 창업주, 민족시인 이육사를 만나 독립운동에 뛰어든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 등 숱한 기업인이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했다. 이에 CNB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이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연재하고 있다. 두 번째는 광복군으로 활약한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다. (CNB=도기천 기자)

 

관련기사: [임시정부 100년-겨레와 함께한 기업①] 대한제국의 자존심 ‘동화약품’


유 박사 민족정신, 남북평화에 일조
전 임직원 숭고한 뜻이어 나눔 실천
인재양성 꿈…50년 장학사업 이어져


유일한 박사는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 9세 때 대한제국 순회공사 박장현, 조카 박용만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6년간 초등학교를 다닌 뒤 네브라스카 주 커니로 이주했다.

박용만이 1909년 커니의 한 농장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소년 유일한도 자연스럽게 이 학교에 입학해 민족정신을 갖게 됐다. 신문배달과 에디슨 변전소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고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약하며 청소년기를 보내다 1916년 미시건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현지에도 민족운동의 열풍이 불었다. 그해 4월 미주한인대표자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는데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유 박사는 재미 한인대표 자격으로 결의문 작성을 주도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 동창인 윌레스 스미스와 함께 1922년 라초이(La Choy) 식품회사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뒀다.

 

1909년 미국에서 설립된 한인소년병학교 재학시절 생도들의 모습. (유한양행 제공)

하지만 1925년 사업차 귀국했을 때, 국권을 침탈당한 채 빈곤과 질병 속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의 현실을 보고 제약회사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건강한 국민만이 장차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 하에 1926년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당시 의약품은 한약재를 기초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양약을 수입하려면 일본의 허가가 필요했고, 그러다보니 일본 제약사들이 양약 시장을 독점했다.

이런 환경에서 유한양행은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며 당시 서민들 사이에 만연했던 피부병·결핵·학질·기생충 등의 치료제 개발에 힘썼다.

1930년대 들어 미국의 아보트사와 합작으로 중국 대련에 약품 창고를 세우고 만주지역으로 사업을 넓혀 나가는 한편, 안티푸라민을 자체 개발해 판매했다. 안티푸라민은 약이 귀했던 당시 온 국민의 만병통치약이었다. 어디가 안좋다 하면 무조건 바를 정도로 ‘할머니 약손’ 같은 존재였다.

이후 유한양행은 중국, 베트남 등에 위장약·구충제·결핵치료제를 수출했으며, 만주와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에 해외 지사와 공장, 출장소를 세웠다. 한국 최초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 이는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에게 큰 자긍심이 됐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유한양행 중앙연구소. (유한양행 제공)
 

50대 나이에 광복군 되다

유 박사는 독립을 위해 직접 총을 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41년 12월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회사를 뒤로 하고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참전했다.

당시 그는 김호를 비롯한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쳐 로스엔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했다. 이후 부대 이름을 ‘맹호군’으로 변경해 상해임시정부 군사위원회의 인준을 받았다.

특히 한국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키려 한 미국의 냅코(NAPKO) 작전에 50대의 나이로 고된 훈련을 겪으며 참여했는데, 이 작전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외교전도 치열하게 전개했다. 유 박사는 1945년 1월 12개국 대표 160명이 버지니아 주 핫스프링에 모여 개최한 태평양문제연구회(IPR: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회의에 정한경, 전경무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여해 국제사회에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1969년 44기 주주총회에서 유일한 박사(오른쪽)가 전문경영인 조권순 사장에게 경영권을 이양하고 있다. (유한양행 제공)

 

전 재산 교육사업에 기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나라를 되찾자, 유 박사는 이듬해 7월 귀국해 유한양행을 재정비했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격동기에서 꿋꿋이 한길을 걸으며 제약보국의 신념으로 회사를 이끌었다.

이후 나라가 안정되자 유 박사는 교육사업에 힘썼다. 1953년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설립하고 1960년대에는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세워 기술 인재 양성에 공을 들였다.

특히 사재를 출연해 1970년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現 유한재단 및 유한학원)’을 발족했는데, 1971년 숨지기 전 유언을 통해 전 재산을 이 기금에 출연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식들에게 대물림 하지 않고 사회에 기부한 것은 당시 한국 재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였다.

유한의 애민(愛民) 정신은 노사관계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라는 생각에 1936년 개인기업이었던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바꿨다. 1937년 주식 일부를 종업원에 나눠주는 종업원 지주제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으며, 1962년에는 한국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해 사회에 기업을 공개하고 자본과 경영을 분리했다.

1958년에는 ‘유한의 정신과 신조’를 만들어 세상에 공표했다.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특히 유 박사는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1969년에 은퇴하면서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조권순 씨에게 사장직을 물려줬다. 이는 한국 재계에서 처음으로 전문경영인에게 길을 열어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한은 또 성실납세기업으로도 유명하다. 1968년 3월 ‘세금의 날’을 맞아 업계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이래 지금까지 우수납세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유한양행은 ‘주인 없는 회사’로 불리기도 한다. 역으로 해석하면 1800여명의 임직원 모두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유한양행은 창업 이후 단 한 번도 노사 분규를 겪지 않았다.

 

유일한 박사의 애민(愛民)정신은 인재양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유한재단 장학금 수여식. (유한양행 제공)
 

“직원 모두 회사 주인” 뜻잇는 사회공헌

가난과 나라 잃은 설움에 고통 받던 민중을 위해 목숨 걸고 투쟁했던 그의 정신이 지금은 소외된 이들에 대한 나눔과 인재양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한재단(이사장 한승수)은 설립 이래 현재까지 49년간 매년 우수특성화고 학생과 대학생을 선발해 졸업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급하고 있다. 그동안의 장학금 수혜자는 연인원 4600여명, 지원금액은 150억원에 이른다. 또 ‘남북하나재단’을 통해 추천 선발된 70명의 북한 출신 대학생들에게 2017년부터 장학금을 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환자에게는 의약품을 지원하고 있으며, 유한의학상, 결핵및호흡기학술상 등을 통해 보건분야 학술 활동을 돕고 있다.

임직원들은 각 사업장별로 지역사회 내 기관들과 네트워크를 맺고 주거안정서비스(집고치기, 냉난방지원), 보육시설 지원, 홀몸어르신 및 장애인 지원, 재능기부 등 맞춤형 나눔 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2008년부터는 생명나눔의 기본적 실천인 헌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북녘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돕는 일에도 음으로양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007년 ‘유한킴벌리 금강산 나무 심기’ 행사에서 남한 신혼부부가 북한 주민들과 함께 나무를 심고 있다. (유한킴벌리 제공)

 

유한킴벌리, 민족정신 이어 ‘북녘땅 나무심기’

1970년 유한양행과 킴벌리클라크의 합작사로 설립된 유한킴벌리 또한 유일한 박사의 뜻을 잇고 있다.

1984년부터 36년간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을 펼쳐오고 있는데, 그동안 생명의숲, 산림청 등과 손잡고 국·공유림에 5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700개 이상 학교에 숲을 만들었다.

아울러 미세먼지와 황사의 발원지 중 하나인 몽골에 여의도 면적의 11배에 이르는 ‘유한킴벌리 숲(사막화방지 숲)’을 조성했으며, 한반도 북녘의 숲 복원을 위해 1999년부터 북한에 나무를 심어오다 2009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중단됐다. 그동안 약 1300만 그루의 묘목이 북녘 땅에 뿌리를 내렸다.

또 저소득층 청소녀를 위해 생리대를 기부하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누적기부량이 약 400만 패드에 달한다. 최근에는 미세먼지로 인한 건강 피해를 줄이고자 50만개의 황사마스크를 기부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유일한의 숭고한 삶은 후세에서 거듭나고 있다.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으며, 1995년에는 자유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04년에는 기업인 최초로 경인국도 부천 구간을 ‘유일한로’로 명명해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SK그룹, 남양유업 등 재벌 3세들의 잇단 마약 추문이 불거지고 있는 때다 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그의 정신은 상대적으로 더 큰 울림을 주고 있다”며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모든 기업인들이 유일한 박사의 삶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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