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현실에도 아랑곳 않고 여러 기업들은 ‘해방의 마중물’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소화제를 팔아 독립군 자금을 댄 동화약품 민강 사장, 일제 지명수배를 받던 독립운동가를 도와준 구인회 LG 창업주, 독립군 자금줄이 된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한 허만정 GS그룹 창업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박승직 두산 창업주, 직접 광복군이 된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등 숱한 기업인이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했다. 이에 CNB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연재한다. 첫 번째는 대한제국의 자존심이 된 ‘동화약품’이다. (CNB=도기천 기자)
암울한 시대 ‘국산 활명수’ 한줄기 빛
북만주 오가던 독립군들 자금줄 역할
지금은 소외된 이들 ‘생명수’로 거듭나
122년 전인 1897년, 故 민강 선생은 서울 순화동에 우리나라 첫 제약회사인 동화약방(동화약품의 전신)을 세웠다. 급체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던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소화제인 활명수를 보급했다.
활명수가 탄생한 시기는 대한제국이 탄생한 해(1897년)였다.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 갔던 고종이 그해 10월 환궁한 뒤 전 세계에 대한제국이 건국을 선포했는데, 바로 이 즈음에 동화약방이 문을 연 것.
당시 민강 선생의 부친인 민병호 선생은 대한제국 궁중선전관이었다. 그는 궁중에서만 복용되던 생약의 비법을 서양의학에 접목해 백성들에게 전했는데, 이것이 활명수의 시초다.
활명수는 이름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 물(살릴活, 생명命, 물水)’이라는 뜻이지만, 민족을 살리는 물이기도 했다. 활명수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이 전개됐다는 점에서다.
민강 선생은 1909년경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한성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본인이 중심인 ‘한국약제사회’ 가입을 끝내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같은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울 순화동 동화약방 건물에 임정의 비밀 연락사무소였던 ‘연통부’를 설치했다.
민강 선생은 국내외 연락을 담당하고 정보를 수집했으며,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으로 독립자금을 조달해 임정에 전달하는 행정책임자로 활약했다.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지참했다가 현지에서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조선의 독립을 갈망했던 고종의 마음이 활명수를 통해 민족운동으로 거듭난 셈이다. 동화약방 옛터(서울시 중구 서소문로9길 14)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 연통부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민강 선생은 민족교육에도 힘썼다. 소의학교(현 동성중·고교)와 조선약학교(현 서울대 약대)를 설립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수차례 이어진 옥고로 1931년 48세 나이로 순국했고 1963년에 건국훈장독립장에 추서 되었다.
쉼없이 독립투쟁 이어가
이후에도 동화약품의 독립을 향한 투쟁은 계속 됐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남승룡 선수가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자 승전보를 알리는 축하 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했다.
당시 광고에는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는데, 일제 치하에서 상처 받은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7년 회사 지휘봉을 물려받은 고 윤창식 선생도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경제적 자립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목표 하에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해 총무로 활동했다. 또한 빈민 계층을 도운 ‘보린회’와 '신간회'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다양한 민족 운동을 펼쳤다.
특히 ‘부채표활명수’를 만들어 국내 브랜드 최초로 해외에 공식 진출했다. 중국 시장에서 활명수를 비롯한 29개 제품에 대한 제고 허가를 취득했으며, 만주 땅에 자체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동화약품의 7대 사장인 고 윤광열 회장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일제에게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했다. 이후 중국 상해에서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 중대장직을 맡았다. 그는 1978년 국내기업 최초로 생산직 전 사원 월급제를 도입해 사무직과 생산직 근로자 간 임금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동화약품의 애민(愛民) 정신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시기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년 독특한 디자인을 담은 아트 콜라보레이션 ‘활명수기념판’을 선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발생한 수익금 전액을 물 부족 국가의 식수 정화, 우물 설치, 위생교육사업 등을 지원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동안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했으며, 2017년에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식수위생사업을 도왔다. 지난해 패션브랜드 ‘게스’와 함께 선보인 121주년 기념판의 판매수익금 역시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는 CNB에 “일제 침략 시기에 탄생한 우리기업들 중 일부는 총칼로 맞설 수 없으니 경제력을 기르자는 정신을 갖고 있었고, 이는 당시 상황에서 목숨을 내 건 일이었다”며 “이런 민족의식이 훗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근대화의 뿌리가 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