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문화재청

  • 고유번호 : 717
  • 작성자 : 김민수
  • 작성일 : 2008-10-11 10:15:17
천리장성과 만리장성의 중간선을 한중 국경으로



중국 진,한,당은 북방의 흉노,돌궐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을 축조하였고 당(唐) 태종이 즉위한 후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져 만리장성 북쪽의 돌궐(突厥)을 침략하는 등 주변국에 위협적이었으므로 고구려는 당의 침략에 대비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요하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했다.

중국이 흉노,돌궐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처럼, 고구려(高句麗) 또한 국경인 요동(遼東) 에 연개소문의 지휘 하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는데 북쪽으로 간도 중부 지역인 부여성(扶餘城:농안)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비사성(卑沙城:대련)에 이르는 1000리가 되는 장성이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대한시대가 시작되어 대한제국이 1919년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대한국(大韓國)은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북으로는 말갈(靺鞨:간도)에서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대한국 고종황제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일통(一統)의 업(業)을 세웠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였으며 1905년 11월 17일 고종황제가 비준하지 않아 불법, 무효인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4일 간도의 이권을 얻기 위해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대한제국령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불법 양도했다.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한민족사 최초로 주권재민, 삼권분립을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어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간도가 1945년 대한 광복 이후에도 미수복 영토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지난 2009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에 간도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다. 청과 일제간의 간도협약은 무효이므로 정부는 중국의 간도영유권 무효를 공식 천명하고 통일 대한민국과 중국은 천리장성과 만리장성의 중간선을 국경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조선 왕실의 탄생과 태실(胎室), 교육



왕과 왕비는 침전이 구분되어 있었고 아기를 수태(受胎)할 길일을 받고 하늘과 땅의 만남을 상징하는 합궁(合宮)을 하였으며 한달에 한번인 길일은 제조상궁,관상감에서 초하루 그믐 보름 뱀날 호랑이날을 피해 택하여 올리며 길일이라도 일기가 안좋으면 역시 피했고 합궁하는 날에는 나이 많은 상궁 2 명만 침소를 지켰다.

태교는 성현의 교훈을 새긴 옥판을 보고 그 말씀을 외우는 것으로 아침을 맞이하였으며 임신 3개월부터 어지러운 바깥 세상과 소식을 끊고,심지어 왕과도 편지로 연락하며 음식의 단맛도 경계하고 피리 독주도 피했고 처소에는 늘 정숙을 유지해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몸치장에 신경을 썼다.

5개월부터 낮에는 당직 내시,밤에는 상궁나인이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 등을 낭독하였고 7개월부터는 육선(肉膳)을 피하고,콩으로 만든 음식,각종 채소와 해산물이 상에 오르게 되며,산모는 불로장생하는 생물과 자연물을 그린 십장생 병풍을 보며 자수와 누비옷을 만들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

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한 산실청(産室廳)과 후궁을 위한 호산청(護産廳)을 두었는데 산실청은 중전의 경우 3개월 전에 설치하며,산실청 설치 기간에는 형벌 집행을 하지 않고 출산 후 7일째 되는 날 산실청을 폐지하였다.산실청은 출산과정을 총괄할 도제조와 권초관을 임명하고 내의원의 3제조 등이 배속된다.

산기가 있으면 산실청에서 산실을 꾸미는데 산실은 산모의 안정을 위해 평소 거처하던 방으로 정했으며 순조로운 출산을 위하여 최생부(催生符)를 북쪽 벽에 붙였다.산자리를 깐 후에는 태의를 둘 방향에 주사로 쓴 부적을 붙인 후 의관 차지내관이 순산할 자리를 귀신에게 빌리는 차지법(借地法)으로 귀신들이 악신을 물리칠 것을 부탁하였다.

의관은 왕의 윤허(允許)를 얻어 왕비의 성을 부르며 왕손의 출생이지만 귀신에게 도움을 얻어야 했다.달이 바뀌면 길한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산자리를 달의 덕을 볼 수 있는 길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산자리는 산모의 머리가 달이 떠오르는 방향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다.산기가 있으면 산실에 삼신상을 차려놓고 순산을 빌었다.

왕비가 출산하면 국왕은 구리종을 쳐서 아기의 출생을 알리고,출산 직후에 산실청에서 권초(捲草)를 하고 벽에 붙여둔 최생부를 떼어 불살랐다.원자가 탄생한 지 3일째 되는 날 국왕은 종묘에서 선대 왕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7일째 되는 날 왕은 대신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축하 연회를 성대하게 베푸는 진하(進賀)를 거행하였다.

조선 왕실은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작은 백자로 된 내호(內壺)에 넣어 산실(産室)안에 길한 방향으로 보관하여 두었다.내호는 태 안 항아리,내항(內缸)이라고도 하며 외호에 비하여 홀쭉하게 생겼다.길일을 택하여 태를 보다 큰 항아리인 외호(外壺)에 넣어 밀봉하였다.외호는 태 밖 항아리,태호(胎壺),태항(胎缸),외항(外缸)이라고도 부른다.

헌 동전 하나를 글자가 적힌 부분이 위가 되게 작은 내호 바닥 중앙에 깔고 여러 번 씻은 태를 그 위에 넣고 기름 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빨간 끈으로 밀봉하여 더 큰 외호에 담는다.항아리 사이를 내호와 외호가 움직이지 않도록 솜으로 채워 고정시킨 후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종이로 싼 후 마개와 뚜껑을 닫아 막는다.

왕자가 출생하면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고 길일(吉日)·길지(吉地)를 택하여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태를 묻었으며 태실(胎室)은 대석(臺石)·전석(磚石)·우상석(遇裳石)·개첨석(蓋檐石)으로 구성되었다.관찰사(觀察使)가 왕·왕비·왕세자(王世子)의 태실을 살피게 하였으며 대왕태실의 경계는 300보(步)로 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왕릉은 도성 4대문 100리 안에 조성되었지만 태실은 왕실과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려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국의 명당을 찾아 조성되어 왕실은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다.태실로 정해진 명당들은 거의 무쇠솥을 엎어 놓은 형상,혹은 바다 위에 거북이가 떠있는 형상인 돌혈(乭穴)에 속한다.

경기 남양주,광주,연천,포천,가평,강원 원주,영월,경북 영천,김천,울진,구미,상주,예천,성주,경남 마산,양산,사천,하동,부산,충북 충주,청원,충남 서산,보은,금산,홍성,부여,공주,전북 완주,광주 등 명당을 찾아 반드시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선택하여 그 위에 태를 묻고 태봉(胎封)이라 하였고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

왕과 왕자,공주 모두 태봉이 있으며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전국의 명당을 찾아 묻은 것은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왕족이 무병장수하여 왕위의 무궁한 계승에 기여할 것이라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따른 것으로 사대부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서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의 배출을 막으려 하였다.

아기를 임신한 비빈(妃嬪)은 빛깔이 아름다운 옥과 자수정을 가까이 했으며 가야금과 거문고 소리,천자문,명심보감을 태아에게 들려주었고 정서 안정과 집중력 향상을 위해 바느질을 하였고 단백질 보충을 위해 콩으로 만든 음식을 많이 먹었다.

원자의 양육을 담당한 보양청(輔養廳)과 강학청(講學廳)은 천자문,동몽선습,대학,격몽요결 등의 경서 학습과 원자의 음식,옷,서책의 공급을 관장하였고 머리가 맑아지는 조청,피로를 풀어주는 소금 목욕 등 학습 능률을 올리기 위한 보양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원자(元子)는 아침에는 왕실 어른께 문안드리고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피며 격식에 맞는 옷차림과 정숙한 태도로 생활해야 했고 통과의례(通過儀禮)와 국가 행사에 참여하여 장차 국왕이 되어 의식을 주관할 때 필요한 몸가짐을 익히기도 하였다.

원자가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세자시강원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제왕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시강원(侍講院)의 교재는 효경이나 소학을 쉽게 풀어 쓴 효경소학초해나 역대 국왕의 행적 가운데 모범이 되는 사례를 모은 조감,자성편 처럼 특별히 왕세자의 교육을 위해 편찬된 책이었다.

국왕과 세자는 신료와 군사들을 이끌고 사냥을 나가는 강무(講武)를 시행하였으며 평소에는 활쏘기와 말타기로 체력을 다졌다.친히 밭을 가는 친경례와 누에를 치는 친잠례는 궁중에서만 생활하는 왕세자에게 백성들의 생활을 일깨워 주었다.



대한제국 황실 복식과 어차 (御車)



조선 국왕의 대례복(大禮服)인 면복은 면류관,곤복으로 구성되어 있다.면류관은 사각형의 천판에 면류(옥구슬)를 매단 관이며 곤복은 중단,의,상을 입고 대대를 두르고 폐슬,혁대,패옥,방심곡령,수,말,석,규를 착용했고 장문이라고 해서 여러 무늬가 수놓이는데 조선 국왕은 9장문,대한국 황제는 12장문이다.

중단은 겉옷 안에 입는 옷인데 두루마기와 형태가 비슷하지만 소매가 넓으며 깃에는 불문이 금박되어 있다.의는 저고리,상은 치마,대대는 허리띠와 비슷한 것이다.폐슬은 허리부터 무릎 아래에 드리우는 사각형의 천이며 장문이 수놓아져 있으며 혁대는 품대로 허리에 두르는 사각형의 띠로 신분을 나타낸다.

패옥은 허리에서 양 옆으로 늘어뜨리는 옥 장식이며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방심곡령은 둥근 고리 모양에 사각형이 매달려 있는 형태로 가슴에 늘어뜨린 것이다.수(綬)는 후수라고도 하며 허리에서 뒤쪽에 늘어뜨리는 띠이며 품계에 따라 문양이 다르며 말(襪)은 버선을 말하며 석舃)은 신발을 말하고 규(圭)는 손에 드는 옥판인데 위는 삼각형 모양이고 아래는 네모지다.

국왕이 면복(冕服)을 입으면 왕비는 그에 맞추어 적의(翟衣)라는 의복을 착용한다.적의는 대례복(大禮服)으로서 활수대의(闊袖大衣)의 포제(袍制)에 속하는 적의와 중단(中單)·상(裳)·폐슬(蔽膝)·대대(大帶)·혁대(革帶)·패옥(佩玉)·수(綬)·말(襪)·석(舃)을 착용하고 규(圭)를 든다.

왕비의 대례복인 황원삼(黃圓衫)은 다홍색과 남색 색동 끝에 흰 한삼을 달았고,비빈의 대례복인 홍원삼(紅圓衫)은 자적색(紫赤色) 혹은 다홍색 길에 노랑색·남색 색동 끝에 흰 한삼을 달았다.공주,옹주의 대례복인 초록원삼은 연두색 길에 다홍과 노랑 색동 끝에 흰 한삼을 달았고 가슴에는 봉(鳳)흉배를 달았다.큰 띠에는 금박문양을 넣었는데 황원삼에는 용문(龍紋)을,홍원삼에는 봉문(鳳紋)을,초록원삼에는 화문(花紋)을 넣었다.

조복은 왕과 문무백관들이 설날,동짓날의 하례,의식에 착용하던 예복으로 신하들이 입는 백관복 가운데 가장 화려한 옷으로 금관을 같이 쓴다고 해서 금관조복이라고 한다.왕의 조복은 원유관을 쓰고 강사포(絳紗袍)를 입었는데 고종황제가 등극하면서 황제가 착용하는 통천관(通天冠)으로 바뀌었다.

포(袍)는 붉은 강사 또는 홍단으로 만들었는데 깃,도련,소매 끝에 붉은색 선을 두르며 중단은 백초,백라,백사 등의 비단으로 하며 붉은 색 깃에 불문을 그린다.폐슬(蔽膝),대대(大帶),패옥(佩玉),수(綬),규(圭),방심곡령 등은 면복과 동일하며 말(襪)은 흰색,석(舃)은 흑색이다.

1895년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과 함께 제도적으로 양복이 공인되었고 1899년 외교관의 복식을 양복화하였으며 1900년 문관의 예복을 구미식으로 바꿔 대한제국(Daehan Empire)의 관복제도가 양복화되었다.관복이 양복화됨에 따라 상류층은 양복을 입기 시작하였으나 일반인들은 한복을 착용하였다.

1903년 어극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식(稱慶式)'을 전통예술극장인 광무대(光武臺)에서 열었으며,대한국(大韓國) 고종황제는 경운궁부터 광무대까지 행사 이동시 사용할 포드 또는 캐딜락 승용차 1대를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御車)로 수입을 지시하였다.

궁내부는 알렌 미국 공사를 통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 1대를 수입하였다. 알렌 미국 공사는 1884년 대한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워 신임을 받고 고종 황제의 주치의를 지냈다.

인천항에서 하역하고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1902년 개통한 한강철교를 건너 남대문역에서 내려서 경운궁까지 가야 했으므로 칭경식이 끝난 후에 도착하고 황제의 행차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차가 시끄럽게 소리나고 빨리 달려 황제 행차에 사용하지 못하였다.

1908년 황실용으로 수입되었던 2 대의 차가 최초의 어차가 되었는데 한 대는 고종황제용 영국제 흑색 다임러 리무진이고,다른 한 대는 순종황제용 프랑스제 적색 르노 리무진이었다. 1910년 한 대를 더 수입한 차가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캐딜락 리무진이다.

고종황제가 어차를 타고 행차했다거나 일반인들이 행차 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경술늑약(庚戌勒約) 이후인 1911년부터 순종황제는 캐딜락 리무진을,순정황후가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을 탔으며,의친왕(義親王) 이강 공은 미국제 오버랜드를 애용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대외관계,국가의례



중국과는 임진왜란에 명의 원군이 큰 도움이 되었고 명과 청의 전쟁에 5만 명의 원군을 파병하였다.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동지사(冬至使)의 정기 사절이 있고,무역도 이루어져 말·인삼·화문석·모피·모시를 수출하고 약재·서적·견직물·도자기를 수입하였다.

여진족에는 회유와 강경책을 병행하였는데 복속한 여진족의 추장에게는 관작을 주고 무역을 하기도 하였으며 세종에서 성종까지 4군 6진을 확보하고 수차례 대규모로 정벌하였다.후금에 대한 배금정책의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조선은 청에 항복하고 말았으나 효종은 북벌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과의 사대관계를 계승하여 청과의 관계에서도 사대관계가 유지되었으며 무역도 증가했는데,사신에게는 사무역이 허용되었으며 17세기 이후 사신을 통해 서양 문물와 천주교가 수입되었다.국경에는 시장이 개설되었고 조선 후기에 국내 상업이 발달하자 밀무역인 후시(後市)도 성행하게 되었다.

철종 말에서 고종 초 사이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며 각종 자원이 풍부한 간도를 개척하여 농경지를 만들었다.간도에 대한 조선과 청 양국간의 최초의 교섭은 1712년에 있었으며, 이때 양국의 대표들은 백두산에 올라 현지조사를 통해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였다.

1897년 이후 2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토록 하였으며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 9월 4일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일본과는 1419년 대마도를 정벌하고 회유책으로 1443년 계해약조를 맺어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였고 미곡·대장경·서적·면포 등을 수출하고 동(銅)·석(錫)·후추·약재를 수입하였다. 1510년 삼포왜란으로 외교 단절된 후 1512년 재개되었으나 세견선(歲遣船),교역 물자를 반으로 제한하였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했는데,7년 간의 전쟁 끝에 조선은 일본을 물리쳤으나 큰 피해를 남겼고,조선 후기의 사회·경제·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1609년 일본과 외교를 재개하여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1869년 조선에 파견되었던 일본 외무성 관리 3명이 돌아와 일본 정부에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하였다.이 내탐서에는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조선 영토가 된 시말(始末)에 대해 조사하고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령이라고 결론지은 내용이 나와 있다.

1877년 일본 정부 최고 권력기관 태정관(太政官)은 태정관 지령문(太政官指令文)을 통해 울릉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였다.1900년 10월 25일,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는 칙령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관할 구역으로 독도(Dokdo)를 포함시키고 대한제국 관보를 통해 공포하였다.

조선 왕실의 국가의례는 환구제,종묘제,사직제,선농제,선잠제,문묘제의 길례(吉禮),흉례(凶禮),빈례(賓禮),가례(嘉禮),군례(軍禮) 등의 오례(五禮)를 말하며 오례의 체제가 조선 왕실의 국가의례로 된 것은 세종실록에 기록된 오례(五禮)로부터 출발하여 성종이 1474년 편찬한 국조오례의를 통해서였다.

오례(五禮)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등의 제사에 관한 길례(吉禮),국상(國喪)이나 국장(國葬)에 관한 흉례(凶禮),출정(出征) 및 반사(班師)에 관한 군례(軍禮),국빈(國賓)을 맞이하고 보내는 빈례(賓禮),국왕 즉위,세자 책봉,국혼(國婚),사연(賜宴) 등에 관한 가례(嘉禮)를 말한다.

오례의는 길례(吉禮)로써 나라의 귀신을 제사하고,흉례(凶禮)로써 나라의 상사(喪事)를 슬퍼하고,빈례(賓禮)로써 다른 나라들과 친하고,군례(軍禮)로써 나라들을 화동(和同)하며,가례(嘉禮)로써 만백성과 친한다는 국가 운영의 원칙이자 유교이념의 가치를 실천하는 규범이다.

국조오례의가 편찬된 후 새로운 예제가 생겨나면서 국가의례는 계속 늘어갔으나 왜란과 호란 이후에 오례의 중 개정되거나 폐지되어야 할 부분이 많아져 영조가 1744년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수정,보완하여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편찬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Daehan Empire)이 출범하면서 고종이 광무황제에 등극하자 황제국에 걸맞는 국가 의례를 정비하게 되어 편찬한 의례서가 바로 대한예전(大韓禮典)으로 이때부터는 대한국 황실의 국가의례를 황제의(皇帝儀)로 격상되어 거행하였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통치체제



조선의 통치체제는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하던 조선 최고의 행정 기관인 의정부를 중심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이조,호조,예조,형조,병조,공조의 6조,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왕의 특명에 의하여 죄인들을 다스리는 기관인 의금부,정치 전반에 걸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며 왕권과 신권의 전제를 막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3사,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로 나뉘어져 있다.

궐 안에는 회의공간인 빈청(賓廳),대청(臺廳),정청(政廳)과 어명 전달,관보 발행하는 승정원(承政院),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국정 자문,간쟁하는 홍문관(弘文館),문서 제술,사초 기록하는 예문관(藝文館),어제 어필 보관,학술 연구하는 규장각(奎章閣),5위(五衛) 통솔하는 5위도총부(五衛都總府),국왕 학습,국사 논의 위한 경연(經筵)시행하는 경연청(經筵廳),천문(天文),측후(測候),각루(刻漏)를 맡은 관상감(觀象監),임금이 타는 말·수레를 관리한 내사복시 (內司僕寺),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보루각(報漏閣),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재화(財貨)·금·보화 등을 관리하는 상의원 (尙衣院),내시를 관리하는 내반원(內班阮),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檢書廳),왕실에 필요한 약을 조제하고 치료하는 내의원(內醫院) 등의 궐내각사가 있다.

궐 밖에는 국정 총괄,관청 통제하고 의견 조율하는 의정부(議政府),어명에 의한 수사 및 심판, 탄핵에 대한 판결하는 의금부(義禁府),관직 및 법령 서경, 관리 탄핵,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관직 및 법령 서경, 간쟁하는 사간원(司諫院),직무 없는 당상관 우대하기 위한 중추부(中樞府),음식물 감독,왕명 전달,궐문 수직(守直),청소 등 궐내 잡무보는 내시부(內侍府),사직단(社稷壇)을 관리하고 제례 봉행하는 사직서(社稷署),어명을 받아 장병 시찰 독려하는 체부청(體府廳),군수품을 저장·출납 관리하는 군자감(軍資監),쌀과 궁중에 공급되는 장(醬) 등을 관장하는 사도시(司導寺),쌀, 콩, 자리, 종이 등의 물품을 공급하는 풍저창(淵儲倉),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한 광흥창(廣興倉),궁중에서 사용하는 의약과 왕이 하사하는 의약을 제조 공납하는 전의감(典醫監)이 있다.

군무를 통괄하던 삼군부(三軍府),도성과 외곽지역 방어하는 5군영(五軍營),왕의 계보 초상화 보관,왕과 왕비의 의복 관리한 종친부(宗親府),녹찬(錄撰)과 종실(宗室) 사무,왕실 족보 연구하는 종부시(宗簿寺),종친과 왕의 외척,왕실 외손을 예우하는 돈녕부(敦寧府),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충훈부(忠勳府),왕이나 왕세자의 사위가 속한 의빈부(儀賓府),도교(道敎)의 일월성신(日月星辰)에 제사하는 소격서(昭格署),미곡·포목 및 잡물·노비 등을 조달하는 내수사(內需司),원포(苑圃)를 관리하고 재배하는 사포서(司圃署),향응(饗應)에 필요한 음식과 직조(織造) 등을 담당하는 덕천고(德泉庫),성균관 유생들에게 급식하는 쌀·콩 등을 관장하는 양현고(養賢庫),종묘와 사직의 제향과 의시(儀諡)도 맡았던 봉상시(奉常寺), 손님 접대와 연향(宴享) 및 종재(宗栽)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예빈시(禮賓寺)가 있다.

문관 인사,공신과 종친 관리하는 이조(吏曹)와 호구,인구 파악,통계 기록,재정 출납하는 호조(戶曹),교육,외교,문과 시행하는 예조(禮曹),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무관 인사,무과 시행하는 병조(兵曹),법령 담당,상급 재판 심리하는 형조(刑曹),모임 인허가 및 평가,물품 관리,토목 공사를 담당한 공조(工曹),서울의 수비를 담당하고 군인을 훈련 감독하는 훈련도감(訓練都監),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의복,옷감의 염색,직조 등을 담당하는 제용감(濟用監),창호지 및 유지(油紙)와 기타 종이와 돗자리 등을 보관,조달하는 장흥고(長興庫), 염세(鹽稅)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의염창(義鹽倉),시장과 점포 단속,물가 조정한 경시서(京市署),조하(朝賀),제사,찬알(贊謁) 등의 국가 의식을 맡아보던 통례원(通禮院),서적의 출판 출납,향축(香祝) 및 인전(印篆)의 관리 등을 맡은 교서관(校書館)이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신설된 궁내부(宮內府)는 일반 행정과 완전히 분리된 왕실 업무를 총괄하였으며 궁내부의 수장은 궁내부 대신이 맡았다.1899년 광무개혁을 통해 의정부를 정책 결정 기구로,궁내부는 집행부로 삼아 대한국의 양부 체제를 갖춘 이후 대한국 고종황제가 근대화 관련 사무를 궁내부에 관장시켜 광무개혁을 주도하게 하여 궁내부가 확대되었다.

황후에 관련된 일을 맡은 황후궁(皇后宮),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侍講院),황제의 손자를 교육하는 강서원(講書院),황태자비에 관한 일을 맡은 황태자비궁(皇太子妃宮),황자(皇子)의 보익(輔翼),시강,호종(護從)을 맡아보던 친왕부(親王府),황가의 사무와 회계를 맡아보던 황족가(皇族家),황족의 자제를 가르치는 종인학교(宗人學校),황제의 호위를 맡은 호위대(扈衛隊)가 있다.

황실 경비의 예산·결산을 맡은 내장원(內藏院),황제의 진찰과 어약(御藥)의 조화(調和)를 맡아보던 태의원(太醫院),시종(侍從)과 시강(侍講)을 관장하는 시종원(侍從院),황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아본 비서원(秘書院),황실의 예산,지출을 맡아보던 회계원(會計員),황실의 계보를 맡은 종정원(宗正院),황제의 친척·외척 보첩(譜牒)을 관장한 돈녕원(敦寧院)이 있다.

원구단의 일을 맡아보던 원구단사제서(圓丘壇司祭署),종묘를 관리하는 종묘서(宗廟署),사직단(社稷壇)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어진(御眞)·어제(御製) 어필(御筆)과 왕실의 전적,도서의 모각(模刻) 등사(等事)를 관장하던 규장각(奎章閣),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문한(文翰) 처리,황제를 자문하는 홍문관(弘文館),의식과 제례(祭禮),외국 사절의 인접(引接)을 관장하던 장례원(掌禮院)이 있다.

황실 제도를 맡아보던 제실제도정리국(帝室制度整理局),철도를 관장하는 철도원(鐵道院),한성과 신의주 간 철도 부설을 위하여 설치한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황제의 의복,보물을 관리하는 상의사(尙衣司),제사(祭祀)와 시호(諡號)를 맡은 봉상시(奉常寺),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비원(秘院),궁중의 연회·음식을 맡은 전선사(典膳司)가 있다.

국내외 서적 보관하는 박문원(博文院),궁궐을 경비하는 경위원(警衛院),외국과의 왕복 서류 번역을 맡은 예식원(禮式院),도량형을 관장하는 평식원(平式院),외국여행을 관장한 수민원(綬民院),관개(灌漑)·관수(灌水)를 맡은 수륜원(水輪院),개간(開墾)•종식(種植)•천택(川澤)•강해(江海)•제언(堤堰)•어렵(漁獵),진상을 담당한 어공원(御供院)이 있다.

황실의 토목,건축,영선을 맡은 영선사(營繕司),황제가 타는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태복사(太僕司),전화와 철도를 맡은 통신사(通信司),광산을 맡은 광학국(鑛學局),전각의 수리를 맡은 주전사(主殿司),궁중 물품 구입,건물 수리하는 물품사(物品司),식료품,특산물을 맡은 제용사(濟用司),사찰과 산림,성보(城堡)를 맡은 관리서(管理署)로 구성되었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太極旗), 국새(國璽)



대한국의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하였다.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며 건괘(乾卦)는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하고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 2일 체결된 조미수호 통상조약 조인식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태극 문양을 흰색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도형기(太極圖形旗)를 임시 국기로 사용하였고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느낀 김홍집은 태극 도형기에 8괘(卦)를 첨가하여 태극과 8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

1882년 9월 박영효는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으며 고종은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과 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Daehan Empire) 수립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등극하여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어새(皇帝御璽),황제지보(皇帝之寶),칙명지보(勅命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시명지보(施明之寶),대원수보(大元帥寶),원수지보(元帥之寶)를 새로 제작하였다.

러일전쟁을 예견한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1903년 독일,이탈리아,러시아 황제,프랑스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일제가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였다.

고종황제가 프랑스 대통령,독일,러시아,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한 황제어새는 2 종류인데,한 종류는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다른 한 종류는 1906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유리원판 사진만 남아있다.

대한제국 초기에 제작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1903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궁내부 상의사(尙衣司)에서 관리하는 것이나,고종황제가 직접 국새를 관리한 점은 러일전쟁 발발 이후 대한제국의 정치적인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황제,왕과 황후,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의 신실(神室)에 봉안한 의례용 어보(御寶)와 국새(國璽)를 비교해 보면 어보의 무게는 3.4kg으로 국새의 4배에 달하며 크기에도 큰 차이가 있으며 어보는 은과 구리가 주성분인 반면,국새는 은과 금으로 제작하였다.



궁(宮) 궐외각사 사적 지정 원형 복원을



조선은 국왕이 공식으로 활동하며 생활하는 법궁(法宮)과 화재나 의외의 재난에 대비하여 만든 이궁(離宮)의 양궐 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국왕과 왕세자(王世子)가 비(妃),빈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별궁(別宮),왕이 즉위하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왕이 행사에 참석할 때 임시로 머문 행궁(行宮)이 있었다.

법궁 경복궁(景福宮)은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 근정전(勤政殿),왕의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 사정전(思政殿),대전 강녕전(康寧殿),중궁전 교태전(交泰殿),동궁전 자선당(資善堂),세자가 학문 강학하는 비현각(丕顯閣),세자의 사무 공간인 계조당(繼照堂),대비전 자경전(慈慶殿),집현전(集賢殿) 수정전(修政殿)이 있다.

북편에는 고종이 친정을 한 건청궁(乾靑宮),사신 접대,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齋),내전 흥복전(興福殿),만경전(萬慶殿),집경당(集慶堂),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璿源殿), 왕 장례시 관을 모셔두는 빈전 태원전(泰元殿),왕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혼전 문경전(文慶殿),국상시 사용하는 회안전(會安殿)이 있다.

후원은 녹산(鹿山),향원정(香遠亭)과 신무문(神武門) 북편에 있는 오운각(五雲閣),옥련정(玉蓮亭),농사 기원하는 경농재(慶農齋),고종이 신하에게 칙지(勅旨)를 내린 대유헌(大有軒),문과 시행하는 융문당(隆文堂),무과 시행하는 융무당(隆武堂),과거 시행, 군사 훈련하는 경무대(景武臺) 등 북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의공간인 빈청(賓廳),대청(臺廳),정청(政廳)과 어명 전달,관보 발행하는 승정원(承政院),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국정 자문,간쟁하는 홍문관(弘文館),문서 제술,사초 기록하는 예문관(藝文館),어제 어필 보관,학술 연구하는 규장각(奎章閣),5위(五衛) 통솔하는 5위도총부(五衛都總府),국왕 학습,국사 논의 위한 경연(經筵)시행하는 경연청(經筵廳),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재화(財貨)·금·보화 등을 관리하는 상의원 (尙衣院)의 궐내각사가 있다.

궐 밖에는 국정 총괄,관청 통제하고 의견 조율하는 의정부(議政府),어명에 의한 수사 및 심판, 탄핵에 대한 판결하는 의금부(義禁府),관직 및 법령 서경, 관리 탄핵,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관직 및 법령 서경, 간쟁하는 사간원(司諫院),직무 없는 당상관 우대하기 위한 중추부(中樞府),음식물 감독,왕명 전달,궐문 수직(守直),청소 등 궐내 잡무보는 내시부(內侍府),사직단(社稷壇)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가 있다.

군무를 통괄하던 삼군부(三軍府),도성과 외곽지역 방어하는 5군영(五軍營),왕의 계보 초상화 보관,왕과 왕비의 의복 관리한 종친부(宗親府),녹찬(錄撰)과 종실(宗室) 사무,왕실 족보 연구하는 종부시(宗簿寺),종친과 왕의 외척,왕실 외손을 예우하는 돈녕부(敦寧府),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충훈부(忠勳府),왕이나 왕세자의 사위가 속한 의빈부(儀賓府),종묘와 사직의 제향과 의시(儀諡)도 맡았던 봉상시(奉常寺)가 있다.

문관 인사,공신과 종친 관리하는 이조(吏曹)와 호구,인구 파악,통계 기록,재정 출납하는 호조(戶曹),교육,외교,문과 시행하는 예조(禮曹),무관 인사,무과 시행하는 병조(兵曹),법령 담당,상급 재판 심리하는 형조(刑曹),모임 인허가 및 평가,물품 관리,토목 공사를 담당한 공조(工曹),서울의 수비를 담당하고 군인을 훈련 감독하는 훈련도감(訓練都監),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이 있다.

대한 황궁 경운궁(慶運宮)은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종황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종황제 등극의례를 봉행한 태극전(太極殿),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 경효전(景孝殿),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후원 상림원(上林苑),황실 사무,근대적 광무개혁 추진한 궁내부(宮內府),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궐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으며 공식 의례와 조회(朝會)를 행하는 정전(正殿) 인정전(仁政殿),왕이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便殿) 선정전(宣政殿),왕의 개인 생활,침식 공간인 대전(大殿) 희정당(熙政堂),왕비가 생활하는 중궁전(中宮殿) 대조전(大造殿),세자가 생활하는 동궁전(東宮殿) 중희당(重熙堂),세자 학문 강학하는 성정각(誠正閣),세자의 서재 승화루(承華樓),세자의 사무 공간 시민당(時敏堂),부속 건물 진수당(進修堂)이 있다.

내전 경훈각(景薰閣),보경당(寶慶堂),낙선재(樂善齋),석복헌(錫福軒),수강재(壽康齋),왕의 어진(御眞)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선원전 재실 양지당(養志堂), 대비전(大妃殿) 만수전(萬壽殿),부속 건물 영모당(永慕堂),연회 공간 영화당(暎花棠),서재 기오헌(寄傲軒),후원은 태극정(太極亭),소요정(逍遙亭),취한정(翠寒亭),농산정(籠山亭), 취규정(聚奎亭),부용정(芙蓉亭),애련정(愛蓮亭),청심정(淸心亭),승재정(勝在亭),존덕정(尊德亭) ,관람정(觀纜亭),농수정(濃繡亭)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경궁(昌慶宮)은 의례 공간인 정전 명정전(明政殿),국왕 사무 공간 편전 문정전(文政殿),강학 공간 숭문당(崇文堂),중궁전 통명전(通明殿),대비전 자경전(慈慶殿),세자 강학 공간 신독재(愼獨齋),내전 환경전(歡慶殿),경춘전(景春殿),통화전(通和殿),양화당(養和堂),연희당(延禧堂),건극당(建極堂),외원(外苑) 함춘원(含春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궐 경희궁(慶熙宮)은 공식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正殿) 숭정전(崇政殿),왕이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便殿) 자정전(資政殿),왕의 개인 생활,침식하는 대전(大殿) 융복전(隆福殿),왕비가 생활하는 중궁전(中宮殿) 회상전(會祥殿),내전 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경륜재(經綸齋),위선당(爲善堂),상휘당(祥暉堂),함춘헌(含春軒),안희합(安喜閤),지효합(至孝閤), 내전 별실 덕유당(德游堂),덕유당 부속 공간 사물헌(四勿軒),내전 하례(賀禮) 공간 광명전(光明殿)이 있다.

왕의 어진(御眞) 봉안하는 태령전(泰寧殿),왕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계상당(啓祥堂),대비전(大妃殿) 장락전(長樂殿),대비전 부속 건물 봉상루(鳳翔樓),용비루(龍飛樓),대비전 별당 어조당(魚藻堂)과 동궁전 내당(內堂) 즙희당(緝熙堂),양덕당(養德堂),동궁전 부속 건물 중서헌(重書軒),동궁전 별당 경선당(慶善堂),세자 사무 공간 경현당(景賢堂),세자 서재 문헌각(文獻閣),세자 강학하는 존현각(尊賢閣),혼천의(渾天儀) 설치한 규정각(揆政閣),휴식 공간 청한정(淸閒亭),춘화정(春和亭)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1615년 광해군이 경운궁(慶運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한 이후 창경궁(昌慶宮)의 중건 공역(工役)이 진행되고 있는데 풍수승(風水僧) 성지(性智)에 의하여 인왕산 왕기설(王氣說)이 강력히 제기되었고 광해군은 인왕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 1616년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필운동,누하동에 있었던 인경궁은 새로 영건하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인력과 재력이 소모되었고,경덕궁의 영조(營造)가 병행된 관계로 재정적 어려움이 가중되었지만 광해군은 공사를 강행하였다.인조 10년 인목대비가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 서거하였으며 인조 26년 인경궁의 재와(材瓦)로 홍제원(弘濟院)을 지었다.선왕(先王)의 후궁(後宮)들이 거처하는 자수궁(慈壽宮)은 옥인동에 있었다.

안동별궁(安洞別宮)은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비(妃)인 명성왕후를 맞아들이기 위해 신축한 건물로 안국동에 있었다.창의궁(彰義宮)은 영조의 잠저(潛邸)로 통의동에 있었으며 숙종 45년 경의군(敬義君)이 탄생한 곳으로 궁 안 장보각(藏譜閣)에 영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다.예종(睿宗)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사저 수진궁(壽進宮)과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의 용동궁(龍洞宮)은 수송동에 있었다.

장의동본궁(壯義洞本宮)은 태종,세종의 잠저로 청운동에 있었으며 어의궁(於義宮)은 사직동에 있던 궁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곳이다.용흥궁(龍興宮)은 효제동에 있던 효종의 잠저였으며 인조·현종·숙종·영조·순조 대에 걸쳐 왕후의 가례(嘉禮)가 거행되었다.이현궁(梨峴宮)은 인의동에 있던 광해군의 잠저이며 운현궁(雲峴宮)은 고종의 잠저이며 흥선대원군의 저택이었다.

조선 초 조성된 행궁은 풍양궁(豊壤宮),온양행궁,초수행궁,이천행궁이 있고 인조,숙종은 남한행궁,북한행궁,강화행궁,전주행궁,격포행궁,월미행궁을 조성하였으며,정조가 화성행궁과 노량행궁,시흥행궁,과천행궁,사근참행궁,안양행궁,안산행궁을 조성하였다.

정조가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행길에 들렀던 시흥행궁(始興行宮),화성행궁(華城行宮),내란이나 대외적인 침략에 대비한 남한행궁,북한행궁,강화행궁,전주행궁,월미행궁,격포행궁,휴양(休養)목적의 온양행궁,초수행궁,이천행궁이 있었다.



조선 왕조 1897년 대한 제국




국왕의 임종이 가까워지면 정사를 보는 곳에 모시고 왕세자와 신하들이 마지막 명령을 기다리며 숨이 끊어지면 곡을 하고, 내시가 평소에 국왕이 입던 웃옷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상위복'(上位復)을 3번 부르고 던지면,다른 내시가 그 옷을 받아 국왕의 시신을 덮는다.

왕세자·대군·내명부(內命婦) 모두가 머리를 푼 다음,흰 옷과 흰 신,거친 베로 만든 버선을 신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상사의 절차에 소홀함이 없도록 엄하게 영을 내리고,이조에서는 초상을 집행할 관원과 업무를 정하며 내시들이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힌다.

음식을 갖추어 술잔을 올리고,왕세자·대군·왕비·내명부 등이 각자의 위(位)에 나아가 곡을 하며 문관은 동쪽,무관은 서쪽에 서서 모두 곡을 하고 4번 절한다. 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를 물리고,시신이 썩지 않게 나무틀을 짜서 얼음을 넣어 시신의 사면을 둘러싼다.

붉은 칠을 한 의자에 흰 천으로 영좌(靈座)를 만들고,붉은 천에 금박으로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이라고 써서 영좌 오른쪽에 둔다.3일째 되는 날 사직·영녕전·종묘에 고하고 베로 시신을 싸서 묶는다.다시 음식을 올리고,공조에서 관을 준비한 뒤 시신을 묶어 관에 넣는다.

음식을 차려 올리고 선공감에서 정전(正殿)의 서편에 빈소를 차린다.다시 음식을 올리고,선공감(繕工監)에서 중문 밖에 대신이 머무를 의려(倚廬)를,내시들이 별실에 왕비·왕세자빈·내명부들이 머물도록 의려를 마련한다.다시 음식을 올리고,왕세자 이하 모두가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상복의 규격과 상기(喪朞)를 정하고, 왕위를 오래 비워 둘 수가 없으므로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한다.왕위에 오른 사실을 교서(敎書)로 대내외에 알리고 국정을 처리한다.외국에 사신을 보내 국상을 알린다.매일 새벽과 저녁에 음식을 갖추어 잔을 올리고 아침과 저녁에 상식을 올린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음식을 올리고 곡을 한다.날을 받아 의정부에서 영의정이 모든 관리와 함께 분향한다. 지관을 시켜 터를 잡고 날을 잡아 땅을 판다.시호를 의논하여 정한 뒤 종묘에 결정된 사유를 알리고,상시(上諡)의 예를 행한다.

발인(發靷) 전날 관을 닦고 점검한다.음식을 갖추고 왕이 술을 올려 발인을 고한 뒤 관을 상여로 옮기는데,그 전에 중문 밖에서 상여로 옮긴다는 사유를 고한다.관을 상여로 옮기고 출발하기 전 상여를 수행할 문무백관의 자리를 정하고 묘지로 향한다.노제(路祭)를 한 뒤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하관하고,흙을 덮는다.

조선 왕릉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도성 4대문부터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입지조건이 명시되어 있으며 여주의 영녕릉과 영월의 장릉을 제외하면 도성 4대문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바람,물,불,나무,흙의 화가 없고,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추어야 하며 뒤로 주산이 펼쳐지는 가운데 산허리에 봉분이 위치하였다.

청룡과 백호가 좌우를 감싸며,봉분 맞은 편에 마주하는 산맥이 있어야 훌륭한 자리라고 여겼으며 정해진 입지의 어느 방향에 봉분이 위치할 것인지 어느 방향을 바라보도록 조성할 것인지의 결정도 풍수적인 형국이 중요한 기준이었다.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왕릉의 입지를 선택하는데 수개월이 걸리기도 하였다.

왕릉은 자연의 지세와 규모에 따라 단릉,쌍릉,합장릉,동원이강릉,동원상하릉,삼연릉,동봉삼실 등 다양한 형식으로 봉분(封墳)의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왕과 왕비의 무덤을 단독으로 조성한 것을 단릉(單陵)이라 하고,평평하게 조성한 언덕에 하나의 곡장을 둘러 왕과 왕비의 봉분을 좌상우하의 원칙에 의해 쌍분으로 만든 것을 쌍릉(雙陵)이라 한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은 합장릉(合葬陵)이라 하며,정자각 뒤로 다른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常設)을 배치한 것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하고 왕과 왕비의 능이 왕상하비(王上下妃)의 형태로 조영된 것은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 한다.왕과 왕비,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고 곡장을 두른 것은 삼연릉(三連陵)이라 하며 왕과 왕비,계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은 동봉삼실(同封三室)이라 한다.

국왕은 왕릉에 직접 행차하여 산릉제례(山陵祭禮)를 지내는데 봄 ,여름,가을,겨울의 사시,동지(冬至) 후 3번째 술일(戌日)의 납일(臘日)과 한식,단오,중추의 속절(俗節),그리고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치르는 정기적인 제례와 임금이 친히 능에 와서 치르는 친제(親祭)를 봉행하였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시신조차 불에 태워진 채 유해도 없던 명성왕후는 2년간 장례도 치르지 못했는데 고종이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광무황제로 즉위하며 명성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追尊)하였고 11월 21일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다시 치르고 청량리에 장사 지내며 능호를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는 경운궁 함녕전에서 67세로 붕어(崩御)하였고 대렴(大斂)이 끝나자 1월 30일 오후 4시부터 남양주 금곡에 능을 잡고 산역(山役)을 시작하였고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에서 천장이 시작하였으며 2월 12일 현궁(玄宮)을 열고 명성황후는 금곡으로 이장되었다. 3월 3일 발인한 고종의 장례행렬은 금곡으로 도착했고 명성황후와 고종은 3월 4일 합장하였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릉 홍릉은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홍릉은 정자각(丁字閣) 이 ‘일(一)’자형으로 변화되었고,이름 또한 ‘침전’으로 변경되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고 월대는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기단이 축조되었고 바닥의 마감도 전돌로 되어 있다.문인석과 무인석이 차례로 마주 보고 서고,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유릉은 대한제국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閔氏) 그리고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尹氏)의 능이다.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황제가 됨으로써 능역 조성도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았다. '一'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으며,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낙타·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홍릉과 순종황제의 유릉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의 홍유릉 경역은 대한제국 황실의 묘역이다. 홍유릉 경역에는 고종황제,명성황후,순종황제,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이구 공이 함께 잠들어 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유네스코에 제출한 <조선왕릉 및 대한제국 황제릉> 평가결과 보고서에서 ‘등재 권고’로 평가했으며 문화재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조선왕릉 및 대한제국 황제릉’은 스페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시,경기도, 강원도에 소재한 조선 시대(1392년~1897년) 506년 동안 존속된 25대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릉 및 대한 시대(1897년~1910년) 황제와 황후의 릉 40기를 망라한 ‘조선 왕릉 및 대한제국 황제릉’이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황실문화재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경운궁 석조전에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을 신설하고 경희궁,별궁,행궁,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경기전,장릉,준경묘 등을 흡수 통합하여 경운궁에 황실문화재관리소를 신설하고 궁, 단, 전, 능, 원, 묘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여야 한다.



고궁박물관 대외관계 통치체제 전시해야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이라 국호를 정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 대안문 앞에 환구단(圜丘壇)을 쌓고, 10월 12일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환구단에 나아가 천제를 봉행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다.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고, 황지지위(皇地祗位)는 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2층 동쪽,서쪽에 있고,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은 3층 동쪽에 있으며,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는 3층 서쪽에 있다.

1910년 대한병탄 후 환구단의 건물과 터를 관리한 일제 총독부가 1913년 대한제국 황단 환구단을 헐고 호텔을 지었고 환구단 터는 현재 원형 복원이 불가능하며 광무 3년(1899년)에 축조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8각 3층 건물 황궁우(皇穹宇)와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는 돌로 만든 석고(石鼓) 3개만 남아 있다.

총독부가 제천단 환구단(圜丘壇)과 대한 황궁 경운궁 동편 궁내부,대안문 권역을 철거,이전하고 호텔,경성부를 악의적으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으므로 경운궁과 환구단의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경성부청사를 철거하고,경운궁 대안문 앞에 환구단을 복원, 환구대제를 봉행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대한국 제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국립박물관은 황실박물관(Royal Museum)을 표방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이므로 서울박물관이 아니라 국립고궁박물관이 제실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여야 옳다. 통감부,총독부는 대한 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를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하고 국외로 불법 반출하여 현재 교육기관,기록기관과 외국이 소장중이다.

대한 황실 미술공예품은 1909년 순종황제가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하였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 후 총독부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어 현재 서울지방박물관이 임시 소장중이므로 문화재청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고 제실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여야 한다.

대한국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외국으로 불법 반출 후 환수하였거나 고등교육기관·문화서비스기관이 임시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국새·칙령·어찰·도성궁궐도·유리원판사진 등 대한 황실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궁궐건축실을 통치체제실로 개편하고 대외관계실을 신설하여야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태극기,애국가,국새,칙령,동해(East Sea) 독도(Dokdo)·간도,도성·궁궐,환구제,종묘제,사직제를 적극적으로 전시 홍보하여야 하며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전문가,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리스트
123
 
배너

섹션별 주요기사